분열 연습은 계속되었다.
쏟아져 내리는 한여름 하오의 따가운 햇볕을 등으로 받으면서 5열 종대의 반듯한 대열은 중대장이 뒷짐을 지고 있는 사열대를 향하여 점점 다가갔다. 후줄근하게 젖은 바짓가랑이가 정강이에 붙었다 떨어졌다 할 때마다 아랫도리엔 더운 김이 확확 치밀었다.
(이번엔 제발 민구가 걸려들지 말아야 할 텐데 발을 맞추고 가슴을 쭉 펴고 팔을 절도 있게 흔들면서 눈을 똑바로 뜨고 아 - 그런데 민구가 제대로 해낼까.)
제1소대가 사열대를 통과하고 있다. 1소대장 강소위의 쩡쩡 울리는 구령이 귓가에 맴돌았다. 소대원들의 고개가 일제히 우측으로 돌아갔다. 중대장은 흡족한 표정으로 답례를 했다.
(합격이구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찝찔한 땀이 입 언저리로 스며들었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토요일 오후 그날도 햇볕은 따갑게 내리 쪼였고 텅 빈 학교 운동장 한복판에 우리는 정열해 서있었다. 음악 선생은 아침부터 우울한 낯이었는데 우리는 그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면서 제각기 악기를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조그만 어촌에 중학교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열리는 음악회여서 지도하는 선생이나 연습하는 우리들이나 모두 흥분과 긴장과 불안 같은 것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음악선생과 우리를 난처하게 만든 것은 민구였다. 부족한 악기를 충당하고 음악회에 필요한 경비를 부담한 사람이 민구 아버지여서 학교측에선 억지로 민구를 멤버에 집어넣었지만 민구는 곧 싫증을 내었던 것이다.
(오늘은 제발 민구가 리듬을 제대로 맞추어서 심발을 쳐주었으면-) 나는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이 없다기 보다는 지루하고 피로한 눈빛으로 지도선생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민구 잘 맞추어서, 자, 시이작.』
지휘봉이 허공을 맴돌아 떨어지자 우리들의 타악기는 일제히 소리를 내었다. 나는 탬버린을 치면서 민구의 심발이 울릴 마디(小節)마다 가슴을 조이면서 귀를 기울였다. 갑자기 음악선생이 손을 딱 멈추고 노여운 얼굴로 민구를 노려보았다. 우리들은 모두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모두의 눈길이 자기에게 쏠리자 그는 정신 없이 두들기던 심발을 내던지고 마구 교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1소대의 후미가 사열대를 완전히 통과하자 나는 뱃속에 힘을 넣었다.
『중대장이 또 너를 지켜볼 거야. 민구 가슴을 펴라, 힘을 내고.』
『우로오 봐앗.』
두 줄기로 찢어지듯 내 목소리는 갈라져 나갔다, 꼼짝도 않고 서서 대열을 내려다 보던 중대장은 지휘봉으로 군화 코를 토닥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소대가 연병장 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나는 등에 와서 머무는 중대장의 간지러운 시선을 느꼈다. 화기 소대의 후미를 마지막으로 분열 연습을 일단 끝마친 우리들은 다시 소대 별로 대형을 위하고 사열대 앞에 정돈했다.
사단창설 기념 분열식에 참가하기 위해 일주일 전부터 계속된 중대 자체의 예행 연습은 일단 끝난 것이다. 그리고 중대장의 최종 점검(点檢)도 어쨌든 끝났다. 남은 것은 적당한 대가(對價)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애초에 중대장이 일종의 방침으로 내세운 것이었다. 경쟁을 시키고 평가를 하고 결과에 따라서 적당한 대가를 치르고- 참으로 편리한 지휘 방법이었다.
이윽고 중대장은 두 손으로 지휘봉 양끝을 쥐고 허리를 받치면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기 딴엔 중대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의 버릇이었다.
『2소대를 제외한 나머지 소대는 해산하라. 그리고 별명이 있을 때까지 휴식을 취한다.』
각 소대는 소대장들의 해산 구령과 함께 ‘와아’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제각기 나무 그늘이나 냇가로 흩어져갔다. 갑자기 넓어진 듯한 연병장 한가운데에 우리 소대만 덩그러니 남아서 중대장의 다음 명령을 기다려야 했다. 대열 속에서 누군가 ‘휴우!’하고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햇볕은 더욱 뜨겁게 내려 쪼여서 나른한 사지는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중대장이 단에서 껑충 뛰어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우리 소대 앞으로 다가섰다.
『2소대 느네들은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놈들이냐? 똑같은 육군 정량(定量)을 먹고 네놈들은 어디가 덜돼서 밤낮 그 모양이냐 말야. 발도 하나 제대로 못 맞추는 놈들, 특히 좌측인 3번- 넌 임마 뼉다구 없는 짐승야? 왜 그리 흐느적거려. 게다가 한눈까지 팔고 남들은 모두 우로 봐를 하는데 넌 임마 혼자서 좌측으로 고개를 돌리고 흐느적 흐느적 걸었지? 마, 뭘 봤어? 뭘 보고 있었느냐 말야.』
중대장과 바로 마주 선 나는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사병들에 대한 욕설이 아니라 소대장인 나에 대한 핀잔이었다. 그리고 좌측 열 3번 박민구(朴敏九) 일병. 나는 민구를 돌아보았다. 그는 표정이 없는 딱딱한 얼굴로 앞사람의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었다. 동요하거나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담담하게만 보이는 민구의 낯빛은 중대장의 분통을 더욱 돋구어놓기만 했다.
『2소대, 약속대로 네놈들은 지금부터 소대장 인솔 하에 특수훈련을 실시한다. 목표 351고지, 시간은 사십 분, 낙오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라.』
특수훈련, 351고지를 향한 구보. 눈앞이 아찔해지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곧 중대장의 명령을 명확하게 복창하고 대열을 향해 돌아섰다. 중대장의 눈앞에서 비굴한 얼굴빛을 보이기는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피로와 땀에 젖어 맥 빠진 자세들로 늘어선 소대원들 맨 뒤에 바위처럼 건장하게 버티고 서있는 소대 선임하사의 거무스레한 얼굴과 비꼬는 듯한 눈길이 줄곧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발견했을 때 그에게 짓눌리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난 이래봬두 전쟁터에서 살아남았고 군대에서 뼈가 굵은 놈이거든. 지금은 당신 같은 애숭이의 부하이긴 하지만.)
남풍이 불어왔다. 대열을 스치고 지나가는 더운 바람이 시큼한 땀냄새를 끼얹었다. 나는 호각을 꺼내어 목에 걸고 민구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래 꾸부정한 어깨가 더욱 굽어져서 소대원 누구에게나 미안하다는 듯 사죄하는 몸매였다.
나는 철모를 똑바로 고쳐 쓰고 탄피를 조여 맸다. 그리고 대원들에게 끝까지 낙오하지 말 것을 부탁한 다음 길고 짧게 호각을 불었다. 출발 명령이었다.
낙타의 등을 닮은 351고지는 개울 건너편에 있는 언덕으로 중간의 잘룩한 산줄기가 가리워져서 멀리서 보면 흡사 젊은 여인의 탄탄한 젖무덤처럼 두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솟아있는데 도중에 꽤 넓은 하천이 가로 흐르고 자갈밭과 구릉지대와 억새 풀밭을 통과해야만 하는 자연의 장애물 지대여서 전투훈련과 기합으로써는 매우 안성맞춤인 코스였다.
선두에서 호각을 불며 대열을 지휘하면서 나는 자주 뒤를 돌아보았다. 민구가 차츰 처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튼튼하지 못한 두 다리와 팔의 근육이 9파운드의 엠원 소총을 들고 뛰는 고역을 이겨내기 힘들다는 것은 그의 소대장으로서가 아니라 함께 자라온 친구로서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대원이 개울을 거의 다 건너갔을 때 다시 대열을 정리하던 나는 아직도 개울을 건너지 못한 후미에서 질그릇이 깨지는 듯한 선임하사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온 몸이 땀에 젖은 민구는 개울 한가운데 엉거주춤 서 있었는데 두 개의 뒤뚱거리는 돌멩이 위에 한쪽 다리씩 걸쳐놓고 온 길을 멍하니 되돌아보고 있었다.
『이 먹통아 빨리 건너오란 말이다. 노루 새낀 아직 멀쩡해. 그 보다 너 하나 때문에 전 소대원이 이 고생인 거 미안하지도 않아?』
개울 이편에서 선임하사는 핏대를 세우며 악을 쓰고 민구는 선임하사의 욕설엔 아랑곳 하지도 않은 채 중대 취사장 쪽만 쳐다보고 있었다.
『얼래? 저 병신 좀 보게. 야 못 건너 오겠어?』
그는 마침내 분통이 터져 못 참겠다는 듯 울퉁불퉁한 돌멩이를 성큼성큼 건너뛰어 가더니 민구의 멱살을 사납게 휘어잡았다.
그 바람에 민구의 휘청거리는 몸뚱이가 기우뚱하고 썩은 나무처럼 힘없이 물속으로 쓰러졌다. 몸을 일으키려고 두어 번 사지를 허우적거리다가 그는 그대로 물속에 주저앉아버렸다.
(아- 노루, 노루 때문이었구나.)
그제서야 나는 민구가 온종일 노루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렇다면 분열 연습 때 그의 눈길은 텅 빈 노루 집 부근에 머물고 있었고 그때 취사장 쪽에서 노루는 어정거리고 있었지, 목에 매인 끈을 질질 끌면서-
그렇다, 나는 여기서 노루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그것은 눈부신 햇살이 골짜기마다 가득 쏟아져 내리는 지난 오월의 어느 날이었다고 기억한다. 우리는 2개분대를 편성, 중대 뒷산을 넘어 낮에도 햇빛을 볼 수 없는 천이십일 고지의 좌측 협곡을 수색하고 있었는데 한낮이 훨씬 기울 때까지 골짜기를 헤맨 탓으로 모두들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나는 햇볕이 따사롭게 쪼이는 잔디밭에 대원들을 집결시켜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도록 한 후에 철모를 벗고 소나무 등걸에 기대 앉았다.
조용한 골짜기엔 뜨끈한 햇살이 비쳐내려서 나른하게 졸리움이 밀려왔다. 그때 갑자기 귀청을 후려치는 총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웅크리고 사방을 돌아보았다.
흩어져 있던 대원들도 제각기 재빠르게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바위 위에 기대선 민구의 총구에서 연거푸 서너 발의 실탄이 다시 튀어나갔다. 그러자 바위와 잡목으로 덮인 건너편 양지쪽에서 숲을 헤치고 바람처럼 산등성이로 치뛰는 짐승이 있었다. 노루였다. 달아나는 노루를 향해 대원들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으나 노루는 벌써 산등성이를 넘어간 후였다. 그러나 민구는 조금 전 노루가 달아났던 숲을 향해 조심조심 다가가더니 잠시 후 한 손엔 총을, 다른 한 손으론 피 흘리는 새끼 노루 한 마리를 가슴에 받쳐 안고 숲을 헤치며 나왔다. 새끼 노루는 뒷다리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는데 나는 노루의 가여운 눈매와 민구의 친근한 눈매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가슴 가득히 고이는 더운 눈물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었다. 그날부터 노루를 기르기 시작한 민구의 정성은 참으로 극진한 것이어서 새끼 노루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귀엽기만 하던 모습을 벗어버리고 하나의 의젓한 노루로 성장하여 갔다.
그러나 노루에 얽힌 민구의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라면 나는 약 일주일 전에 일어났던 일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날은 방공호 보수 작업에 전 중대원이 동원되었는데 오전부터 띠잉하게 무거워지기 시작한 내 머리가 오후엔 심한 두통으로 번져서 나는 나머지 작업 지휘를 선임하사에게 인계하고 BOQ에 돌아와 그대로 누워버렸다.
다음날 이른 아침 부대에 들어갔을 때 내무반을 감도는 음울한 공기와 나의 시선을 애써 피하는 고참병들의 불안한 표정과 전 소대원의 무거운 침묵으로 나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음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고 그와 같은 나의 추측은 곧 눈앞에 보이는 현실로 나타났다. 매트리스를 쌓아 올린 내무반 한구석에 민구가 담요를 쓰고 누워있었던 것이다. 담요를 젖혔을 때 나는 퍼렇게 퉁퉁 부어 오른 민구의 얼굴과 터진 입술을 내려다보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민구는 시종 입을 다문 채 눈을 감아버렸지만 소대 연락병과 그 외에 비교적 나의 측근자라고 꼽을 수 있는 몇몇 사병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전날 일어났던 일의 윤곽과 어느 정도의 명암을 가려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선임하사가 민구를 그토록 심하게 때린 것은 기합의 정도를 훨씬 넘은 하나의 행패에 가까웠고 그것은 또한 소대장인 나에 대한 일종의 간접적인 도전이라고 밖에 나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
노루가 싸리 가지로 엮은 허술한 문을 밀고 나와 중대 일종창고 뒤의 영농장으로 어정어정 기어올라간 것은 그날 방공호 보수 작업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그때 마침 바위에 걸터앉아 고참병들과 열심히 음담패설을 지껄이던 선임하사가 그것을 보았다.
『얼래 저 놈의 노루가 배추밭을…』
주먹만한 돌멩이를 집어들더니 노루에게 겨누어 힘껏 던졌는데 그것이 공교롭게도 노루의 옆구리에 정통으로 맞았고 놀랜 노루는 후다닥 산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루가 달아나자 민구는 들고 있던 야전삽을 내동댕이치고 노루를 따라 정신 없이 산으로 뛰어갔다. 작업이 다 끝나 어둑어둑해진 후에야 그는 보드라운 칡순을 한아름 안고 노루와 함께 산에서 내려왔다. 민구가 노루를 따라 간 후에 한동안 그 의젓한 모습을 노려보던 선임하사는 고참병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이 노루고기 안주해서 막걸리 파티나 할까.』
고참병들은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그날 저녁 민구는 선임하사 앞에 불려갔다.
『어이 박일병님 어때? 며칠 있으면 사단창설 기념일인데 그날 회식 때 노루고기 좀 먹을 수 없을까?』
『……』
『더 길러 봤자 그 이상 자라진 않을 테고 이 기회에 전우들 목에 낀 때 좀 벗겨주면 박일병 인기도 오를 테고…』
『……』
『자, 그럼 박일병님의 성의에 감사하는 뜻으로.』
선임하사가 두툼한 손을 민구에게 내밀었다. 그때까지 꼼짝도 않고 서서 차가운 눈초리로 선임하사를 쏘아보기만 하던 민구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선임하사님은 댁에서 기르는 귀여운 강아지나 토끼를 곧잘 잡아 잡수는지 몰라도 전 그런 짓을 못합니다.』
선임하사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내 혈육을 보살피듯 그렇게 길러온 생명을 아무리 짐승이지만 잡아먹…』
민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임하사의 커다란 주먹이 그의 면상으로 날아들었다.
『개새끼 함부로 주둥일 놀려 겁두 없지.』
아무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내무반 시멘트 바닥에 쓰러진 민구의 몸뚱이를 그는 마냥 짓밟았던 것이다.
부대창설 기념일에 노루고기로 중대 회식을 한다는 말은 다음날부터 사병들의 구미를 돋구면서 하나의 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말 민구가 순순히 노루를 내놓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노루 회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일체의 대꾸도 없이 입을 다물어 버리는 민구의 싸늘한 표정에 그들은 모두 위축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노루의 문제에 관해서 그와 이야기하려고 몇 번 기회를 만들었으나 그때마다 그는 돌처럼 차갑게 굳은 얼굴로 묵묵히 앉아있기만 해서 나는 별 신통한 얘기도 꺼내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기만 했다. 그의 경멸하는 듯한 눈초리와 이미 자기대로의 무슨 결심이나 있는 듯한 태도는 나에게 은근한 불안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헉헉거리며 흐느적거리며 6킬로미터를 지쳐 돌아온 사병들은 땀과 먼지로 찌들은 작업복을 훌훌 벗어 던지고 첨벙첨벙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린애들처럼 물장구를 치고 서로 물을 끼얹으며 히히덕거려 대었다. 그들과 조금 떨어진 편편한 바위 위에 나는 민구와 나란히 걸터앉았다. 그는 모래 위를 흐르는 맑은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햇볕에 그을려 까칠해진 그의 목과 등줄기를 꽤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침묵이 우리들 사이의 공간을 메꾸어주었다. 그의 꼭 다문 입과 깊숙한 곳에서 빛을 내는 차가운 눈은 모두를 거부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우는 오후의 햇살이 우리들의 벗은 알몸을 따갑게 내리쪼였다.
『피곤한 모양이군. 자, 등을 이리 대. 물을 끼얹어줄게. 한바탕 씻고 나면 정신이 맑아질 거야.』
그는 엉거주춤 나에게 등을 돌려대고 앉아 한 움큼씩 물을 떠올려서 제 가슴에 부었다. 때가 만져지는 그의 앙상하고 탄력이 없는 등을 문지르면서 나는 그 동안 민구의 생각을 먼 곳에서 바라보기만 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그와 나와의 거리가 이제는 손 닿을 수 없도록 멀리 떨어져버렸음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회한에 잠겨 있었다.
그렇다! 너무나 오랫동안의 방황에서 지친 그의 청년기는 차츰 침식당해 갔고 스스로 풍랑에 내맡긴 그의 피곤한 육체는 이 살벌한 전방까지 표류하여 황량한 골짜기 국방색의 대열 속에서 모두들 상실당하고 있는 것이다. 노루에 대한 그의 끈덕진 집착을 나는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실은 정말로 그가 생각해야 하고 실행해야 할 또 다른 일들을 그는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그가 다시 건강한 생활인으로서의 자기를 되찾고 똑바로 걸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의 이 숨막힐 것만 같은 갈등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은자만의 세계 속에서 헤매고 있는 그에게 나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햇살이 맨 살을 따갑게 내려 쪼여서 나는 물속으로 들어가 벌렁 누워 버렸다.
그때 건너편 바위에 다리를 꼬고 걸터앉아 우리 쪽을 힐끗힐끗 곁눈질하던 선임하사의 눈길이 나와 마주쳤다. 그의 비꼬는 듯한 눈초리에 나는 갑자기 당황하고 있었다. 민구에 대한 나의 어두운 상념은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 없는 또 다른 벽에 부딪혔던 것이다.
내 머리 속에는 어느 틈에 어두운 무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조소와 야유를 퍼부을 것만 같은 관객 앞에 대본을 외우지 못한 서툰 배우를 나 자신으로, 관객을 완전히 무시하고 각본까지 거들떠보지 않는 위험한 주인공을 민구로 하여 침침한 조명과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시간의 무대가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노루가 죽어가는 시간에 민구의 연기를 모든 관객이 흥미를 모아 기다리는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연극이 무리 없이 순탄하게 끝나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난처한 무대에 올라서지 말아야 한다. 민구를 달래자. 그리하여 관객과 적당히 타협함으로써 이 연극을 쉽게 끝내자.)
나는 민구의 눈치를 살피면서 되도록 그의 곤두선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민구 네가 아끼며 길러온 노루가 어쩔 수 없이 죽는다는 게 불쌍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우선 지금 거부할 힘이 없어. 솔직히 말해서 노루를 살리겠다는 무모에 가까운 너의 집착이 엉뚱한 일을 빚어낼 것만 같아서 나는 불안한 거야. 노루가 죽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 큰일도 아닌데 너는 그 속에 몰두해 있는 것 같아.』
그러나 그와 같은 나의 얘기는 팽팽한 고무줄처럼 앙분한 그의 신경을 탕하고 튕겨주는 결과 밖에 되지 않았다. 쭈그리고 앉아 물 속을 들여다보던 그가 갑자기 상체를 똑바로 일으키며 나의 눈 속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비겁하긴 아직두 마찬가지구나.』
그의 차갑게 빛나는 눈빛에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았는데 그 무서운 눈빛은 까마득히 멀어져간 해변의 모래톱을 나에게 갑자기 생각나게 해주었다.
이제는 희미한 채 옛날 얘기로 남아있는 슬픈 기억이 참으로 오랫동안의 껍질을 헤집고 튀어나온 것이다.
그날 해변엔 눈이 내렸고 소리치며 밀려오는 거친 파도가 모래톱 위에 쌓이는 눈을 녹이면서 다시 바다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입학시험을 며칠 앞두고 마지막 정리를 하던 민구와 나에게 눈을 하얗게 쓰고 온 우체부가 희야의 위독을 알리는 전보를 주고 돌아갔는데 우리는 잠시 착잡한 심정으로 책상에 턱을 고이고 앉아 있었다. 민구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전보를 움켜쥐고 밖으로 나갔다. 한참 후에야 나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바닷가에서 눈을 맞으며 서있는 그를 찾아냈다. 그는 차츰 진한 회색 빛으로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바다 저편을 바라보면서 밀려오는 파도에 발이 젖어오는 것도 모르고 멍하니 서있었다.
『오늘 밤차로 내려가자 K읍에.』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지만 나는 막상 대답을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희야가 요양하고 있는 K읍엘 가자면 아무래도 하루는 걸릴 것이고 그곳에서 만일 희야가 죽는다면 우리들의 입학시험은 포기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내 머리 속은 지금 희야가 죽는다는 일만 가득 채워져 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질 거야. 내가 희야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너도 희야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우린 함께 가는 거다. 어쩌면 희야는 우릴 보고 살아날지도 모른다. 그녀는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 우리를.)
나는 희야를 생각했다.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이 바닷가 마을에서 국민학교를 함께 다니고 중학교도 함께 다녔다. 희야를 남겨놓고 서울로 올라가서 민구와 나는 고등학교를 또 함께 다녔다. 똑같이 희야를 좋아하면서도 그녀에게 먼저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고향에 있는 희야에게 우리는 늘 한 봉투에 편지를 넣어 보냈고 희야는 한 봉투에 한 장으로 된 회답을 민구에게 써 보냈다.
방학 동안에 집엘 내려와도 우선 꼭 셋이 함께 모여 바닷가를 걸었다. 우정이라는 너무나 뜨거운 정념으로 우리는 묶여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가냘픈 몸매와 항상 젖은 듯 빛나는 눈망울을 생각했다. 그리고 의사의 진단을 받고 K 읍의 요양지로 떠나던 날 하얗게 질린 낯빛을, 몸부림치는 그녀를 달래며 차에 태우던 우리들의 처절했던 가슴을, 그러나 내 머리엔 다시 근엄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입학시험을 포기한다면, 아- 결국 민구는 그날 저녁 혼자 K읍으로 떠나버렸다. 생각하면 민구의 어두운 방황은 그때 이미 비롯했고 우리들이 죽을 때까지 걸어야 할 두 개의 서로 다른 길은 거기서부터 엇갈렸던 것이다. 입학시험이 끝난 후에야 덥수룩한 머리의 허술한 옷차림으로 다시 돌아온 민구는 희야의 죽음을 나에게 전해주고 어디론가 다시 훌쩍 떠난 채 종적을 감춰버렸던 것이다.
민구의 눈빛은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을 나에게 몰아다 주었다. 그날 바닷가에서 철판이라도 녹여낼 듯 강렬하게 나의 심장을 꿰뚫던 그의 눈길이 지금은 한겨울의 싸늘한 햇빛처럼 가슴 깊숙이 차갑게 파고들었다. 나는 얘기의 순서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장황하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의 옛 심정을 모르는 게 아냐. 노루가 너에겐 단순히 말 못 하는 짐승뿐만이 아니라는 것도 그러나…』
『그러나 두려워하자는 얘기겠지.』
그는 재빨리 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입가에 조용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두려워한다기보다는... 그보다도 우리는 다시 돌아가야 할 땅이 있고 돌아가서 정말로 해야 할 일들이 있지 않아? 우울하고 답답한 이 골짜기를 벗어나서 말이야. 노루가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군대라는 이 혼돈의 무대 위에서 우린 배우에 지나지 않고 그런 우리들에게 지금 개성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야. 오히려 뚜렷한 개성은 위험스럽기만 하단 말이야. 나는 그게 불안한 거야. 너의 비뚤어진 성격이.』
『결국 겁이 난다는 얘기군. 애초에 네가 나의 소대장으로 부임했을 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 우리가 헤어지게 됐을 때 난 이미 너에게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건 없다고 생각했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니까 내 일에 대해서 네가 그렇게 신경을 쓸 건 없다고 생각해. 한가지 군인이기 전에 나는 인간이라는 걸 너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너에게 연극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각본 같은 건 문제가 아냐. 나는 나대로의 연기를 해야겠어. 관객이 어리둥절할 거야. 작자와 연출자는 당황할 테고-.』
그의 유쾌한 듯한 표정에 나는 더 이상 이야기할 아무 것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훨씬 기울어진 하오의 태양이 차츰 서늘한 바람기를 몰아오기 시작하고 건너편 산 그림자가 천천히 그 범위를 넓히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기념행사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빨리 끝났다. 우중충한 날씨 탓일까. 멋없고 딱딱한 식순과 그것은 냄숙이라는 말로도 바꿔 표현될 수 있겠지만 긴장을 강요하는 열병 분열이 처음과 끝을 이었다. 똑바로 정렬한 대열과 군인 정신이 충일한 우리들의 부동자세는 사열대 그늘에 앉은 장군의 마음을 부풀도록 흐뭇하게 했으리라. 그러나 군악대의 행진곡에 맞춘 분열로 행사가 끝났을 때 나는 물에 빠진 해면처럼 피로에 젖어 들었다.
『병력을 부대까지 인솔하시오. 난 사단에서 지휘관 모임이 있다니까 좀 늦을 거요.』
중대장은 그의 철모와 탄대를 벗어 연락병에게 주면서 나에게 무뚝뚝하게 지시하고 오후에 있을 중대 회식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참석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덧붙였다.
『그리구 그 노루말이요. 당신 소대의 박일병이 중대원을 위해 특별히 내놓은 모양이니까 중대원 모두 맛볼 수 있도록 국을 끓이게 하는 게 좋겠소.』
-노루로 국을- 나의 머리 속에 엉클어져 있던 민구와 노루의 문제가 와아 함성을 지르며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대열을 향해 돌아섰다. 그때까지 긴장을 풀지 못한 채 막대기처럼 꼿꼿하게 서있는 대열 속에서 나는 민구를 더듬어 찾아냈다. 철모를 앞으로 눌러 쓰고 오른손으로 소총멜빵을 꼭 움켜쥔 채 입을 다물어버린 그는 나의 시선과 마주치자 재빨리 눈길을 내려 깔았다. 그것은 조용한 거북의 표시같이 생각되어서 나는 갑자기 그와의 소외감을 진하게 느꼈다. 온 몸의 힘이 한꺼번에 풀려 내렸다. 중대에 돌아오자 나는 곧 병력을 해산시키고 도망치듯 BOQ에 돌아와 딱딱한 야전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회식 준비,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런 일에는 이미 익숙해진 취사병들이 부식창고에 남아있는 멸치부스러기나 찌들은 생선토막, 딱딱하게 굳어버린 두부덩어리를 적당히 끓여서 준비해놓을 것이다. 그리고 큼직한 뿌연 막걸리를 가득가득 부어 마시면서 그들은 취할 것이고 끝내는 억지로라도 노래를 부르며 흥겨운 체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군대에서 말하는 회식이라는 거다. 모여서 먹는다는 것 밖인 아무런 의미도 없는-. 취한 후에 그들은 모두 외톨이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제각기 생각에 잠기거나 떠들거나 노래를 부른다. 흥겨움이 아니라 거기엔 애수가 있다. 망향과 비정의 뒤범벅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노루를, 노루를 어쩔 것인가.)
나는 무어라고 이름 지을 수 없는 내부의 흔들림을, 가슴을 쥐어뜯는 혐오를 느꼈다. 그것은 노루의 생명과 민구의 찢기우는 가슴을 위해 아무런 자세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경멸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노크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취사병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내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면서 입을 열기가 난 처한 것처럼 우물쭈물했다.
『뭐야.』
나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돼지처럼 미련하게 살이 찐 상등병 놈이 기름때가 자르르 끄는 작업복 앞자락을 매만지면서
『저- 노루를 잡아야 할 텐데 민구가-』하고 우물거렸다.
『뭐? 노루를, 그런데?』
『민구가 지가 잡겠다구 해 놓구선...』
『민구가 잡아? 민구가 제 손으로 노루를 죽인단 말야?』
내가 재차 소리지르자 놈은 겁먹은 얼굴을 하고 뒤통수를 긁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좀 똑똑하게 생긴 일등병이 내게 한걸음 다가서더니 설명하듯 차근차근 이야기를 했다.
오늘 아침 기상 나팔을 불기도 전에 민구가 노루를 끌고 취사장을 찾아왔는데 이슬이 내린 풀밭을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지 바짓가랑이가 온통 젖었더라는 것이다.
『산 속에 끌고 가서 놓아주려고 했대요, 노루를. 그런데 한참 내려오다 보니까 뒤에서 어정어정 따라오더래요. 돌을 던지구 발길로 걷어차두 그냥 따라 오기에 할 수 없이 도로 끌고 내려왔대요. 그러면서 노루를 제 손으로 잡아서 선임하사를 실컷 먹여주겠다는 거예요. 하지만 자기가 꼭 잡을 테니까 아무도 노루를 건드리지 못하게 지키고만 있으라는 거예요.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그리고 나서 민구는 노루의 젖은 털을 한번 쓰다듬어 주고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임하사님이 아까부터 노루 피를 잡숫겠다고 빨리 잡으라구 야단입니다. 그래서 소대장님께 여쭈어보고 오겠다구 이리로 왔어요.』
『그대로 돌아가 있어. 내 말이 있을 때까지 노룬 그냥 내버려두고 그리고 민구가 오면 나한테 보내 알았어?』
그들이 돌아간 후에 누워버렸다. 열린 창 밖으로 취사장 앞의 넓은 공지가 내다보였다. 낮게 깔린 회색의 하늘이 개울 건너편의 골짜기를 뿌옇게 메웠고 습기를 가득 머금은 후덥지근한 바람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머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대로 잠이 들면 내가 모르는 동안에 이 헤쳐나가기 어려운 일들은 어쨌든 끝나버릴 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 참견할 기운이 없다. 참견해서 내 의지대로 휘둘러 처리해낼 자신이 없는 것이다. 물결처럼 피로가 밀려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빗줄기가 사납게 쏟아져 내렸다. 뽀얀 물보라가 피어 오르는 냇물 한가운데서 시퍼런 대검을 미친 듯이 휘두르던 민구가 제 가슴에 칼을 꽂고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서 분수처럼 치솟은 핏줄기가 냇물을 온통 선홍색으로 물들이자 ‘으악’하고 소리를 지르며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무덥고 끈적끈적한 방안의 공기가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등허리가 식은땀에 촉촉히 젖어 있었다.
그러나 나의 몽롱한 시선이 창문을 통해 취사장 앞 공지에 멎었을 때 나는 다시 경악에 몸을 떨었다. 오싹 소름이 끼쳐왔다. 취사장에서 조금 떨어진 냇가의 자갈밭에 선임하사가 노루의 목에 매인 끈을 한 손에 쥐고 거북한 자세로 엉거주춤 서있고 취사병들도 제각기 하던 일거리들을 손에 든 채 겁에 질린 얼굴로 불안하게 서있는데 이 편 언덕 위에 민구가 소총을 들고 서서 여유만만하게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나는 BOQ 의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민구야 미쳤냐? 정신차려.』
소리지르며 달려드는 나를 민구는 가볍게 뿌리쳤다. 아- 그 차가운 눈빛과 입가에 번지는 야릇한 웃음,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오는 것을 느꼈다.
『제발 민구야-.』
나는 다시 그의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
『오해하지마. 난 그렇게 미련하진 않으니까.』
그는 다시 선임하사와 노루에게 눈길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새끼야. 총으로 죽이믄 고기 맛이 없다니까. 정 네 손으로 죽이고 싶으면 이리 내려와서 칼로 찌르든지 목을 조르든지 하란 말야.』
언덕 아래서 선임하사가 볼멘소리로 고함을 지르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좀 어떻게 해보라는 부탁처럼. 그러나 민구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선임하사와 노루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선임하사님 그 끈을 놓으시죠. 한방이면 깨끗이 죽어 자빠질 겁니다.』
마침내 민구가 침착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완강한 어조로 말하면서 총을 들어 노루를 겨누자 선임하사는 당황한 기색을 억지로 감추며 할 수 없다는 듯 비실비실 물러났다. 네 다리를 자갈 사이에 굳게 버티고 목을 길게 빼어 늘였던 노루는 선임하사가 끈을 놓고 물러서자 그 맑은 눈으로 민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순간 귀를 때리는 총성과 함께 노루 곁에서 먼지가 폭삭폭삭 일어나며 자갈이 튀어 올랐다. 그 바람에 놀라 펄쩍 치솟은 노루는 개울 건너편 언덕으로 쏜살같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라? 저 개애새끼가...』
민구를 노려보던 선임하사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더니 개울을 막 건너간 노루를 쫓아 뛰어갔다.
『야- 임마-.』
나의 외침은 파열하는 총소리에 휩싸여버렸다. 갑작스런 선임하사의 행동에 주춤하던 민구의 눈이 섬광처럼 번쩍 빛나더니 그는 미친 듯이 마구 방아쇠를 당겨댄 것이다.
개울을 건너던 선임하사가 갑자기 몸의 중심을 잃고 그대로 물속에 고꾸라졌을 때야 나는 민구에게 와락 달려들어 주먹으로 그의 면상을 후려갈겼다. 그는 힘없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터진 입술에 빨간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바보오-.』
나는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마구 흔들며 울부짖었다. 피가 흘러내리는 그의 입가에 조용하고 싸늘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총소리의 여운이 길게 메아리를 끌면서 골짜기에 퍼져나가고 후드득거리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196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