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寧國寺에서 -

(12) 단청과 탱화의 배색

아무도 없는 법당안에 들어서니 다람쥐 한마리가 어쩔줄 모르고 있다. 내 눈치를 보며 내 옆을 찔끔찔끔 기어 내가 들어온 문으로 잽싸게 도망갔다. 아마 그놈은 이 절의 구석구석을 훤히 알고 있을 것이다. 어디에 어떤 나무가 있어서 어떤 열매가 열리는지, 어디에 곡식이 있고 어디에 스님이 있는지, 숨을 곳은 어딘지, 사람들이 언제 돌아다니고 언제 잠드는지..

나는 여기와서 비로소 탱화를 자세히 보게 되었다. 단청의 색이 아름답다고 귀가 따갑게 들었어도, 나는 화려함 외에 별 감동을 느끼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곳의(이곳만 그런지는 몰라도) 벽과 천정, 탱화에 쓰인 색깔은 이제까지 본 어떤 배색보다도 특이하고 오묘하다.
영국사 대웅전 벽의 배색 영국사 대웅전 탱화의 배색
전체적인 톤은 올리브그린, 오렌지, 자주(혹은 짙은 갈색)이고, 천정은 더욱 짙은(검정에 가까운) 갈색, 물기를 머금은 은행나무 뿌리같은 색이다. 거기에 청색과 하늘색 위주의 꽃문양이 있다.

탱화의 색은 더욱 희한하다. 모두 다섯장이 있는데, 내 관심을 끄는 중앙과 오른쪽의 두 점은 같은 사람이 그린듯하다. 쓰인 색들 모두가 내가 생각해오던 한국적인 원색이 아니다. 저채도의 색들을 명암과 색채를 변화시켜 사용했고, 고채도, 고명도의 색들(밝은 오렌지나 약간 옅은 노랑)을 포인트 컬러로 썼다. 거기에 특유의 섬세한 옷자락과 문양들, 가느다란 인체의 선들이 합쳐져 묘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색깔만 본다고 해도 아주 마음에 드는 배색이다. 중앙의 그림은 비슷하지만 좀더 채도가 높은데, 아마도 화려한 느낌을 더 살리려고 한 것 같다.
영국사 대웅전 탱화의 배색

2000.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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